졸업의 온도 [김대유의 행복의 온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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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의 온도 [김대유의 행복의 온도](5)
  • 뉴스앤잡
  • 승인 2019.12.24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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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가 끝나고 연말을 지나며 아이들은 졸업을 준비한다. 누구에겐들 졸업이 특별하지 않을까마는 격동의 현대사를 겪었던 50대에게 졸업은 참 지난한 일이었다. 베이비 부머 세대를 관통했던 졸업식의 풍경은 곧 한국의 교육사를 반영한다. 그들에게 시국을 따져보는 일은 역시나 허망한 일이지만, 세대적 정체성(Identity)을 가늠하기에 더 없이 흥미로운 대상임에는 틀림이 없다. 나 자신부터가 베이비 부머다.

 

충남 연기가 고향인 나는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생이 모두 70명 밖에 안되는 작은 학교의 졸업식이었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눈물 쏙 빼놓는 송사와 답사, 1시간이 넘게 이어지는 교장선생님과 내빈의 축사, 지역유지의 관작명이 날로 박힌 여러 종류의 시상식,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안겨주던 그 졸업식의 풍경은, 그러나 ‘빛나는’ 총천연색 대신 낡은 ‘흑백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구구단을 외우던 저학년을 지나 마침내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못하면 집에 보내지 않았던 나날들, 굳이 혼식을 장려하지 않아도 미국에서 수입한 밀가루가 남아돌아 공짜 급식빵을 나눠주던 시절이었다. 선배들처럼 배를 흔하게 곯는 일은 없었지만 빈곤이 떠나지 않던 시대이기도 하다. 겨울에 사용할 난로의 땔감을 위해 솔방울을 한 자루씩 따다가 내야 하는 방학 숙제가 공포스러웠다. 5학년이 되어서 조개탄 난로가 보급되었지만 조개탄이 늘 부족하여 솔방을 따오기는 졸업때까지 지속되었다.

 

어쩌다 불려 간 교장선생님 방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흑백사진이 걸려있었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대통령이 곧 박정희였고, 박정희가 곧 대통령이었으므로 대통령은 영원히 그 한 사람 박정희뿐이라고 믿었다. 교장은 훈화 때마다 박정희 대통령을 칭송했지만 사실 대통령은 먼 신화 속의 인물이었고 진짜 무서운 사람은 가끔 검은색 지프차를 타고 오시는 장학사님이었다. 그분이 오실 때면 대청소는 기본이었고 예쁜 여선생님들은 수업시간에도 불려나가 다과상 차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도덕 교과서 어느 쪽에도 대통령 선출과 민주주의 얘기는 없었고,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알 길이 없는 시대였다.

 

구구단과 조개탄 난로, 소다 냄새 짙은 급식빵, 박대통령의 사진과 국민교육헌장, 빛나는 졸업장을 탔던 초등학교 시절. 그 졸업식은 지금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 속에 박혀있다. 동갑내기 계집애에게 논두렁길에서 연애편지를 건넨 죄로 담임에게 불려가 혼쭐이 나고 일주일간 변소 청소를 벌로 받아야 했던 추억이 그나마 가슴 한켠 아련하게 남아있다. 우리는 마지막 예비교사와 본고사를 치루고 대학에 입학했다. 선발제 고교시험도 마지막 세대이더니 대학입시도 그랬다. 1980년 전국의 4년제 대학 입학생 수는 6만 4천명이었다. 20만 학도를 외치던 시절이다.

 

지금의 50대가 인구비율에서는 최다치를 점유하지만 50대의 대졸학력은 16%를 밑돈다. 소수만이 대학을 진학하던 시기였다. 1980년 5월의 광주민주화 운동, 정확히 애기하면 전두환의 광주학살, 미팅도 못해 본 5월의 찬란한 봄날에 탱크가 교문을 막아섰다. 결국 계엄령과 휴교로 2학기 개학 때까지 캠퍼스에 발을 딛지 못했다.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 동안 대학생들은 음악다방에서 죽치며 You Light Up My Life(Debby Boone)와 같은 팝송을 거듭 신청해서 들었고, 밤에는 막걸리로 지샜다.

 

늦은 밤이면 대학 담벼락에 오줌을 갈기며 시국을 탓했다. 비오는 날이면 만취해서 여학생의 하숙집에 찾아가 꽃다발을 주며 구애를 했다. 실연은 언제나 당연지사였다. 캠퍼스 생활은 데모와 염세주의로 가득찼고 그래도 약은 친구들은 슬며시 사라져서 고시(考試)준비를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극장에서는 청바지 입은 심혜진이 최민수와 연애에 빠지고 남녀평등의 시대가 왔다.

 

당시의 인재들은 고시와 은행, 대기업으로 몰렸다. 그러니 나 같이 사범대를 졸업한 친구들의 취업률이 상당히 좋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들은 굳이 임용고사를 안봐도 거의 모두 사립학교에 교편을 잡는데 지장이 없었다. 좋은 시절이었다. 박정희 장군이 정해준 교육제도가 정권이 암만 빠뀌어도 큰 변화없이 이어진 것도 편한 교편생활을 유지하기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냥 교과서 갖고 달달 외우며 주입식으로 가르치면 되었다. 은행 간 친구들은 40대 후반에 퇴직하면서 5억원이 넘는 퇴직금과 자사의 주식을 한 아름 선물로 받았다.

 

‘끼인 세대’라고 불평하고 자학하지만 솔직히 얘기해서 50대가 지금의 청년세대보다 더 불행한지는 잘 모르겠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이 안되고 밤새워 공부해도 원하는 대학에 가기 어려운 청년들, 밥 굶는 걱정이 없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지금의 청소년과 젊은이들이 겪는 시대적 불안감과 정신적 고통은 50대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아 보인다.

 

50대는 시대적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동시대를 사는 동류로서 그들에게 동정(同情)한다. 그러나 무엇이 그리 불안했는지 약속한 듯 우루루 몰려가 부동산 투기를 하고 다주택 소유자가 되었다. 젊은이들의 앞길을 막았다. 무대책의 저출산과 노령화, 대한민국의 소멸에 베이비 부머 세대의 책임이 크다 아니할 수 없다. 젊은이들의 소외감은 50대의 퇴장을 간절히 바라는 감정의 골을 만들었다. 사지선다형 문제와 선발고사, 예비고사와 본고사의 세대, 젊음을 온통 독재정권에 반납해야 했던 불운함, 주입식 교육의 대표적 희생양이었던 그 가여운 50대에게 나는 지금 돌을 던지고 있다. 난감한 일이다.

 

한편 균형과 혁신의 정치를 만들어냈던 50대의 정신세계가 어떻게 그렇게 한순간에 붕괴될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그렇게 단단했던 민주화의 세대,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고 헌정 사상 처음으로 야당 대통령과 탈권위적인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뽑았던 냉철한 세대, 후배들에게 정치혁신의 주역으로 존경받았던 세대, 이제 그들이 젊은이들의 증오심을 한 몸에 받으며 ‘이상한 세대’로 찍혀 노후에 ‘세대전쟁’의 표적이 되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어서 빨리 세월이 가서 이 지난하고 해괴한 50대를 졸업하고 싶다. 2020년이 두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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