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는 마음의 밭이다! [하영목의 한국형 정서코칭] (1)
상태바
정서는 마음의 밭이다! [하영목의 한국형 정서코칭] (1)
  • 뉴스앤잡
  • 승인 2022.05.10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체는 움직이도록 설계되었다. 움직일수록 건강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동은 어떻게 유발될까?

먼저 하고자 하는 욕구(desire)가 있어야 한다. 욕구는 생명현상의 근원이고, 그 작동원리는 자동화된 시스템에 가깝다. 인간을 탄생으로 이끈 것도 욕구이고, 생명을 거둘 때 신이 가장 먼저 거두는 것도 욕구다. 미각의 상실이 생명의 끝을 알리는 예비신호로 해석되는 것도 그 예다.

인간의 의식(consciousness)과 상관없이 움직이는 욕구는 어떻게 생겨날까? 바로 정서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정서는 ‘마음의 밭’으로 비유된다. 밭이 비옥해야 수확이 풍성해지듯이, 정서적으로 풍요로워야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

일생에서 주어진 시간은 양적으로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어떤 이는 많은 것을 이루고, 어떤 이는 그렇지 못하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까?

정서가 행동 자체는 아니듯이, 정서적 성숙(emotional maturity)이 성공이나 성과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정서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머리가 좋은 사람보다 성공할 확률이 높다. 대니얼 골먼(Daniel Goleman) 박사의 주장에 따르면 무려 4배나 높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역동적인 삶의 에너지’로서 정서를 공부하려 한다. 정서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정서는 움직이게 프로그램되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정서를 미개인처럼 여겼다. ‘서양철학의 아버지’로 불린 플라톤(Plato, B.C. 428~348)이지만, 그는 ‘이성(idea)’이라는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았다. 이성의 눈으로만 보면 정서는 미개인처럼 보일 수 있다. 인간의 의지력으로는 도무지 훈육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플라톤이 틀렸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2,400년 전에는 오늘날과 같은 측정과학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적 발견은 측정기술에 많은 빚을 진다. 전자현미경이 돕지 않았다면, 유전자지도는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의 발명이 선행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정서에 대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심장이식 기술이 보편화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심장의 비밀을 지금처럼 알지 못하고 단지 미신처럼 여겼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토머스 쿤(Thomas Kuhn, 1922~1996)도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적 발견은 그 당시의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정서에 관한 플라톤의 생각은 아직도 유효한 것이 많다. 우선 정서적 성숙에 대한 그의 생각이 그렇다. 그가 비록 ‘정서적 성숙’이라는 어휘를 쓰지는 않았지만, 이성의 힘으로 야생마 같은 정서를 다스리는 것은 현대적 의미로는 정서적 성숙이다. 그러면, ‘정서적 성숙’은 왜 필요한 것일까?

 

[다음 칼럼에서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