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같은 사람 더 없어? 두 명만 데리고 오지!”[박창욱이 전하는 글로벌 성장통](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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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같은 사람 더 없어? 두 명만 데리고 오지!”[박창욱이 전하는 글로벌 성장통](3)
  • 뉴스앤잡
  • 승인 2019.12.05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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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몰아친 8개월간의 2개 신규공장 셋팅과 회장님 지시

사무실로 반가운 전화가 왔다. “전무님! 지난 달에 한국에 들어와 무사히 출산하고 산후조리중입니다. 늘 고마운 마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고 한다. 우리 연수과정에 들어와 연수동기와 결혼하여 1년이 지난 시점이다. 본인과 출산한 딸도 건강하다는 것이다. “내가 고맙다. 열심히 사는 것 같구나. 남편도 잘 있지?”라며 안부를 물었다.

그러면서 인도네시아에서 근무중인 이현성 매니저(가명, 세명대 경찰행정학과)의 근황을 들었다. 한국의 생활가구 회사인 ‘Z사’의 인도네시아 제조공장에 취업해서 다니고 있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의 ‘글로벌청년사업가양성과정(GYBM)’에 지난 2015년 8월에 인도네시아 1기생으로 지원하였다. 현지 생활이 벌써 4년째이다. 자카르타에 취업하며 같은 연수동기생과 결혼했다.

“부하직원 35명에 두개 공장을 넘나 든다고? 그러면, 직급은?” “매니저 입니다. 미국식 직급제도를 택해서 직급제도가 단순합니다. 직책은 물류부서 전체를 총괄하니 현지에 나와 있는 한국기업기준으로 보면 부장급입니다” 입사 4년만에 20년 경력사원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매니저는 2016년 6월에 연수를 마치고 자카르타의 한국물류회사에서 2년, 제조업체에서 1년을 근무하였으나 뭔지 모를 답답함이 있었다. 지인에게 들은 구인소식은 한국회사 ‘Z사’의 ‘물류’업무 책임자 자리였다. 한국에 본사를 두고 자체 브랜드로 제품의 전량을 아마존과 월마트를 통해 판매를 하고 있는 회사였다. 지금은 직원 7,000여명에 한국인 매니저는 22명이다. 입사 합격 결정도 빨랐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이었다. 처음 사무실을 들어가보니 엄청난 일들이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물류업무는 고사하고 공장셋팅업무가 긴박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당장 실어낼 주문 물량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제품주문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주변 동료와 인사도 제대로 나눌 시간이 없었다. 당장 필요한 직원 채용부터 시작했다. 공장에 셋팅되어야 할 기계설비들도 챙기기 시작했다. 전 세계 여러 곳에서 수입이 되니 허가서 준비와 검사, 항구 도착과 동시에 통관으로 이어졌다. 잠시의 방심도 허용이 안되었다. 기계를 하역하는 항구의 세관, 인도네시아 투자청(BKPM)도 방문하는 등 닥치는 대로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때로는 회사의 상사(上司)분을 모시고 통역으로도 거들었다. 오랜 세월 인도네시아에서 비즈니스하신 눈으로 “인도네시아어를 잘 하네. 잘 배웠구먼”하며 칭찬도 받았다. 그렇게 좌충우돌하며 새롭게 셋팅한 제조 공장만 2개였다. 이후 정상적인 업무체계로 돌아서며 뒤이은 엄청난 양의 원부자재가 들어오고, 완성품은 미국으로 실려나갔다. 뒤에 안 일이지만 인도네시아 진출 한인기업 중 TOP3 정도 물량이라고 한다. 모두가 이매니저의 업무였다.
그러는 사이에 부하직원도 40여 명으로 늘었다. 5개월여가 지났다.
본사에서 온 회장님께서 이매니저에게 건네는 말씀이다. “자네같이 훈련된 사람 2명정도 더 구할 수 없을까?”
더할 수 없는 최고의 칭찬으로 생각되었다. 지난 4년간의 인도네시아 현지적응의 고충들이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 그래서 바로 우리 연수원 팀장님께 전화해 GYBM 4기 후배 2명을 요청해서 지금 같이 근무를 하고 있다.

이매니저가 밝힌 소감이다.
첫째 ‘뭐든지 부딪혀 보니 되더라’는 것이다. 스스로도 흠칫 놀라는 경우도 많았다. 해보지도 않고 위축되고 겁먹었던 시절이 저 멀리 아련하다.
둘째 동남아 국가시스템의 낙후성이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한국에 있을 때, 연수를 받을 때 은근히 무시도 하였다. 그런데, 다르게 생각해 보니 그 후진성때문에 나에게 기회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지인 관계자와 마음만 잘 통하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도 보았다.
셋째 그러자면 현지인들의 언어를 알고 정서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뒤늦게 안 일이지만 GYBM연수를 받은 반둥공과대학(IBK)은 수하르토 대통령을 배출한 최고급 대학으로 우리가 배웠던 현지어 교육수준이 상당히 높다고 한다.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쓰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건네는 말은 ‘그렇게 인정받고 2명의 후배와 같이 일하게 되니 김우중 회장님과 연수원장님, 대우의 멘토님, 연수관계자 모두에게 작은 보답을 하였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가 인생의 최고 순간이었습니다’로 말을 맺었다.

통화를 하면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세상 모든 것을 쥔 듯한 기개(氣槪)가 느껴졌다. 5년전의 지원서를 찾아 보았다. 막연한 대학생활과 두차례의 해외어학연수를 거쳐도 앞길이 답답함을 토로하고 있었다. 전공은 공무원관련 분야, 수차례의 자격증도 답이 없었다. 지금 대한민국 청년들의 자화상 그대로였다. 4년이 지난 지금도 하나 바뀐 것 없이 더 심각해지고 있지만…

마무리 인사를 나눴다. “우리 과정에 참가하도록 적극 추천해 주신 아버지, 어머니께도 꼭 감사드려라. 동기 와이프와 새로 태어난 딸래미를 위해 더 열심히 살아가자”는 격려와 감사의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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