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동생 꼭 합격되어 베트남에 같이 있도록…” [박창욱이 전하는 글로벌 성장통](41)
상태바
“제 동생 꼭 합격되어 베트남에 같이 있도록…” [박창욱이 전하는 글로벌 성장통](41)
  • 뉴스앤잡
  • 승인 2021.03.12 10: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형제가 2년 사이에 베트남에서 돌파구를 찾다

“전무님! 제 동생에게 이번 GYBM 베트남 9기에 지원하라고 했습니다. 합격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문자가 왔다. “그래. 이름이 뭔데? 너하고 같은 수준이면 불합격, 조금이라도 나으면 무조건 합격되지 않을까? 후후”

대우세계경영연구회가 주관하는 글로벌청년사업가(GYBM)양성과정 베트남 7기로 2018년 6월에 연수를 마치고 취업한 신희성 군이 다음 해 6월, 9기를 모집할 즈음에 보내온 글과 답이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했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본인이 거쳐간 상황에서 동생이 꼭 따라왔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지난 10여 년에 1,200여명의 연수생 중에는 남매(男妹), 형제(兄弟), 자매(姉妹)가 같이 경우가 많았다. 주로 먼저 간 사람이 동생을 적극적으로 데려온 경우이다. 연수는 물론이고 취업 결과도 대체적으로 좋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동생 신희범 군은 그렇게 연수에 합류하였으나, 도중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팬데믹을 겪으며 가장 불안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우수한 성적으로 마무리하고 작년 7월에 취업에 골인하였다.

둘의 생각과 사연을 각각 들어 정리해보았다.

닮은 모습 - 첫 번째 직장을 떠난 사연

형 : “ 2017년 6월, 한국에서 첫 직장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일본 본사의 한국 법인 정리 때문이었습니다. 한국 공장에서 부품을 제조하여 디스플레이 업체에 공급하였는 데, 인건비를 포함한 경쟁력이 떨어져 제3국으로 공장을 이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6개월 밖에 안된 상황에서 청천병력과도 같았습니다. 이미 팀장급 이상은 모두가 각오를 하고 있었다고 하며, 저를 뽑아 주셨던 팀장께서 따로 불러 다른 곳을 알아보라고 하였습니다. 취업대란의 시절에 외국계 기업 취직에 성공하여 느꼈던 자부심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정말 난감하였습니다. 그 때 베트남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동생 : “2018년 1월에 저는 싱가포르에 있는 한국계 글로벌 포워딩(forwarding) 업체 현지 지사에 취직을 했습니다. 변화를 좋아하는 성격 탓인지 1년 여가 지나니 업무에 익숙해지며, 나태해지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월급은 좋았지만 높은 물가에 회의가 들 때 2019년 새해를 넘기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베트남에서 근무를 시작한 형이 싱가포르에 찾아왔습니다. 형에게서 들은 베트남은 미래 발전 가능성과 물가대비 높은 급여 수준은 저에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급여와 생활 수준으로만 싱가포르의 안정적인 생활을 버릴 결정을 하기는 쉽질 않았습니다. 제가 망설이는 눈빛을 보이자, 형은 본인이 한국에서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게 된 이유를 말해주며 변신에 도전하는 길목에 GYBM이 있었다며 자세히 설명해주었습니다. 미련없이 퇴사결정을 하였습니다.

지켜 본 연수기간 1년, 형제는 용감했다.

형은 GYBM 7기, 동생은 9기로 연수에 참여한 것이다. 이직(離職)이라는 작지 않은 경험만으로도 열심히 할 조건을 갖추었지만, 한걸음 한걸음을 묵묵히 내디뎌 나가는 것은 둘이 한결같았다. 베트남어 중급이상, 영어 업그레이드를 기본으로 1년동안 낯선 동료들과 합숙, 매일 아침 5시 반부터 밤 10시까지 교육은 이어졌다. 대기업에 버금가는 직무교육, 리더십, 현지 문화적응에다 매주 1회 치뤄지는 깨알같은 시험, 100권 책 독후감 이외 크고 작은 과제들이 11개월간 계속되었다. 낯선 환경속에서 매일같이 이어지는 강행군이었지만 형이 먼저 갔다는 사실과 같이 도전하는 동기들이 큰 버팀목이 되었다고 말한다. 혼자는 한걸음도 힘들었지만, 같이 하니 천리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모든 과정을 수료하고, 취업도 성공하고, 취직한 이후에도 잘 지낼 수 있는 힘은 같이 연수받은 동기들과 형제의 힘이었다고 말한다.

제각기 다른 길을 간다. 글로벌 정상을 기약하는 각자의 삶은?

형 : “2018년 6월 수료와 동시에 한국계 의류회사에 취직하며 물류업무를 맡아 2년 반이 지났습니다. 주요 업무는 입출고되는 모든 제품을 핸들링하는 것으로 약 15명의 사무직원과 40여명의 현장직원이 한 팀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깐깐한 일본계 바이어가 대부분이다 보니 신경쓰이는 것이 여간 많은 게 아니지만, 같은 나이에 한국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배우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고 자부심은 큽니다.

크게 걱정했던 것은 동생이 연수 중반을 지날 때쯤인 2020년 2월쯤에는 코로나19가 시작될 때였습니다. 당장 우리 회사의 주문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이동이 통제되며 전세계가 예측을 할 수 없는 사태로 갈 때 제일 먼저 동생이 떠 올랐습니다. 마음 많이 졸였습니다. 팬데믹은 그대로였지만, 다행히 주문은 조금씩 회복이 되는 것을 보고야 마음을 놓았습니다. 무난히 취업한 동생이 고마웠습니다.

동생 : “저는 한국계 종이식품용기 제조회사의 베트남지사 영업팀장으로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고객은 베트남 및 글로벌 프랜차이즈 회사입니다. 아직은 회사의 규모가 작아 영업팀의 인원도 채 5명도 되지 않지만, 베트남의 1,2위 식품 기업들은 우리 회사의 성장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전망으로나 역량으로나 기대가 크다는 말일 것입니다. 저 또한 베트남 시장 내에서 업계 1위 달성을 목표로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베트남 10기 후배들이 걱정이 됩니다. 매년 100명씩 연수 인원이 반으로 줄었다고 하니까 말입니다. 일자리 경쟁이라도 덜 하면 좋겠습니다. 형에게서 듬뿍 받은 사랑의 내림이라 하면 건방진 걸까요?.

아쉬움과 희망이 엇갈린다. 세 가지 이유라고 형이 말한다.

“첫째는 부모님을 뵙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휴일이면 주로 동생과 시간을 많이 보내며 경험과 미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부모님도 한 번 모시려 합니다. 예년 같으면 지난 설에는 뵈었을텐데 아쉽습니다. 코로나19로 옴짝달싹 못하고 지냈습니다. 그래도 건강한 게 어딥니까?

오준일 멘토님에게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희망을 봅니다. 우연히 2년을 사이에 두고 형제의 멘토가 되신 것은 우연이 아니겠지요? 큰 사랑에 제대로 인사도 한 번 못 드렸습니다. 앞을 보고 가는 길에 촌철살인의 조언을 주셔서 큰 힘이 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청년들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어려울수록 새로운 기회에 도전하는 작은 동기라도 주었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입니다”

[호치민에 놀러가서 찍은 사진. 왼쪽이 형인 희성, 오른쪽이 동생인 희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